"조선"은
이성계가 1392년
신진사대부와 협력하여 세운 왕조로
첫 국호를 '고려'라 하고 수도를 개성에 두었다가
1394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1398년에는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여
총 26대 국왕이 약 505년 동안 숭유억불 정책으로 통치했고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꿔 황제국으로 선포해
총 2대 황제가 13년 동안 통치하다
1910년 경술국치로 막을 내렸습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 왕실의 구성원과 가계도를 알아봐야 하는데
조선왕실은
왕과 왕의 단 한 명의 부인인 왕비가 있고
왕비가 사망할 경우 계비가 그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왕비가 낳은 왕자와 왕녀들 중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라 하고
왕세자의 부인은 왕세자빈이라 하였으며
왕세자를 제외한 왕의 나머지 아들 중
왕비의 소생은 '대군', 후궁의 소생은 '군'이라는 호칭을 붙였고
왕의 딸인 왕녀들 중
왕비의 소생은 '공주', 후궁의 소생은 '옹주'라 하였는데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왕실을 황실로 격상해
왕을 황제, 왕비를 황후, 왕세자와 비는 황태자와 황태자비,
왕자는 친왕이라 하였습니다
후궁은 사실상 왕의 부인이 아니고
정1품의 '빈'부터 종 4품의 '숙원'까지 품계를 받은 여관으로
간택을 통한 후궁과 궁인 중 왕의 승은을 받아 된
후궁이 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두고 일어난 왕자들 간 싸움으로
태조 이성계가 여덟명의 아들 중
이방원의 이복 동생인
막내아들 의안군 이방석을 세자에 책봉하자
다섯째 아들인 정안대군 이방원이
방석과 그를 지지하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박위, 이제 등
추종세력을 살해하며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라 불리기도 하는
이복형제간의 싸움으로
이방원과 정도전의 관점이 충돌하며 생긴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원인과 발단 ]
1. 세자 책봉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
무명 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맞이한 한 씨와
군공으로 입신양명했을 때 개경에서 맞이한 강 씨 등
두 명의 정처가 있었는데
한 씨는 조선 개국 전인 1391년에 사망해
고려조 왕비를 배출한 당대 제일 권문세가의 딸이었던
강 씨의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이 될 수 있었기에
강 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정비로 삼았고
그의 소생인 어린 두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간택하여
막내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 발단이 되었고
어머니 | 이름 | 작호 | 생몰년 | ||
신의왕후 한씨 |
장남 | 방우 | 진안대군 | 1354~1394 | |
차남 | 방과 | 영안대군 | 1357~1419 | 정종(1398~1400) | |
3남 | 방의 | 익안대군 | 1360~1404 | ||
4남 | 방간 | 회안대군 | 1364~1421 | ||
5남 | 방원 | 정안대군 | 1367~1422 | 태종(1400~1418) | |
6남 | 방연 | 덕안대군 | 미상 | ||
신덕왕후 강씨 |
7남 | 방석 | 무안대군 | 1381~1398 | |
8남 | 방번 | 의안대군 | 1382~1398 | 조선의 첫 왕세자 |
2. 부왕 태조의 처우에 대한 불만
장남 방우부터 6남인 방염까지
내리 6명의 왕자를 낳은
한 씨가 추존 왕비가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의 일로
한씨가 먼저 이성계에게 출가하였으나
서열상 차비에 불가하였으며
1396년(태조 5년) 병으로 서거한 현비 강 씨를
태조가 추모하기 위해 왕후로 추봉하게 됨으로 인해
한 씨 서열은 명목상 후궁이 됨에
한 씨의 소생인 6명의 왕자들이 부왕의 처우에 대한
불평이 대단했고
3. 일반 신료들의 불만
왕세자가 된 방석의 보도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 이하 남은, 심효생 등 소수 재신이
국왕과의 정치적 소통을 장악한 상황에서 일반 신료들의
불만도 높았다고 합니다
4. 사병 혁파에 대한 불만
태조 이성계는 개국 초부터
공신과 종친들을 절제사로 임명해 군권을 분할했고
재위 기간 동안 이를 회수하려 하였고
정도전이 태조의 지원으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사병을 혁파해 군제를 단일화하려 함에
이방원이 반발하여 사병을 가진 공신과 종친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 경과 ]
한양 신도의 공역이 완료된 지 2년 후인
1398년(태조 7년) 음력 8월에
정도전이 남은, 신효생 등과 비밀리에 모의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며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이는데
이를 한 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으로 해석해
예비한다는 명분을 세운 이방원이
이방의, 이방간 등 여러 왕자들을 포섭하고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과 이숙번, 조준, 하륜, 박포, 이지란 등
휘하 부하들을 시켜 군사를 일으켜
남은의 집을 습격해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같은 시각에
박위, 심효생, 이근, 장지화, 유만수까지 살해한 후
변란의 책임을 세자와 정도전 일파에게 전가해
세자 이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 살해하고
같은 강 씨의 소생으로 방석의 형인 방번도 함께 죽였습니다
[ 변란의 결과 ]
이 변란으로 이방석이 세자에서 폐위되고
변란을 일으킨 이방원이 다음 세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방원은
장자승계의 법칙에 따르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변란을 정당화하며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사망한 큰형인 진안군대을 이은
둘째 형 영안대군 방과에게 차기 제왕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전가시켰고
태조는 왕세자 이방석과 7남인 무안대군 방번을 비롯해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둘째 아들인 연안대군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기에 이르니
그가 곧 조선 제2대 정종이고
이때부터 태조는 상왕으로 칭하게 됩니다
그렇게
태조 이성계가 1차 왕자의 난의 충격으로
왕위를 정종에게 내주고 떠난 뒤
"제2차 왕자의 난"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실권을 쥐면서
세자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태조의 4남이자 이방원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 또한
세자 자리를 탐내고 있었으나
인격이나 위세가 이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시기하며
불안해하는 가운데
정종 2년인 1400년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밀고하는 등 이방원을 도왔음에도
그 상작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은 박포의 도움을 받은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켜
이방원의 병력과 개경 선죽교에서 대치하며
전투하는 과정에 패해
거병 작란하여 동기를 모해했다는 죄명으로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방간을 도운 박포는 죽주(지금의 영동)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는데
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하고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 이라고도 합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지며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게 되
결국 정종은 하륜 등의 주청으로 태조의 허락을 얻어
그해(1400년) 음력 2월 왕세자로 삼은 뒤
같은 해 음력 11월에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겨주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 제3대 태종입니다
[ 참고 자료 ]
태조실록, 위키백과, 국가유산포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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