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0일
지난달 고양동누리길 탐방 중 알게 된
태종의 4남인 성령대군의 묘역을 답사하면서 시작한
고양시 역사 사적 탐방을 통한 10,000보 걷기로
걷기 운동을 통한 치매 예방은 물론
역사 공부를 통한 두뇌 훈련과 새로운 취미 생활까지
치매 예방에 좋은 세 가지 활동을
동시에 즐기고 있는 가운데
오늘은
고양시 대자동 주변에 있는
조선 3대 태종의 아들들의 묘들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네이버 지도를 바탕으로
성령대군묘 주변에 여러 왕자들의 묘가 있음을 확인하고
성령대군 묘역 근처에 주차를 하고
태종의 8남인 근녕군 이농의 묘역부터 찾았습니다
필리핀참전비 앞에서 우측 대양로로
0.9km 지점 삼거리에서 11시 방향 우민로로 0.6km 지나
우측 동네길로 들어서면
우측 산기슭에 근녕군 묘역이 보입니다
근녕군(1411년~1461년)은
조선 제3대 태종의 여덟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빈 고씨이고 이름은 '농'이며 시호는 '회의'입니다
1424년(세종 6년)에 근녕군에 봉해졌고
세종을 도운 공으로 익사공신에 녹훈된 후
1426년 가정대부, 1428년 종1품 군, 1430년 정1품 군으로
승계 되었습니다
1455년(단종 3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손위 하는 날
종실 백관이 모여 정난공신에 맹훈할 책에 동맹하는데
혼자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보름 동안 절식하며 세상을 한탄하다 병을 얻어
1461년(세조 7년) 11월 15일
51세로 '예장을 받지 말라'라고 유언하며 사망했고
1872년(고종 9년) 영종정경에 추봉 되었습니다
묘역에는
기다란 사성이 둘러진 단분으로 조성된 봉분과
오랜 세월에 심하게 훼손되어 비문을 알아볼 수 없는
높이 120Cm, 폭 44Cm의 묘비와 상석이 있고
아래로 196Cm 높이의 장명등과 142Cm 문인석 2쌍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근녕군 묘소 답사를 마치고
근녕군의 장남인 옥산군 이제의 묘소를 찾아
동헌로를 건너 동헌로 203번 길로 300여 m 들어가서
'흥록대부 옥산군 신도비'라 쓰여 있는
옥산군 신도비와 그 뒤 묘역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옥산군(1429년~1490년)은
근녕군과 태안군 부인 하양 허 씨 사이 장남으로
태종의 손자입니다
자는 경보, 시호는 공간공이며 이름은 이제로
1442년(세종 24년) 통정대부 원윤에 봉해져
1444년 명선대부 저천정에 올랐고
1469년(예종 1년)에 종 1품 가덕대부를 거쳐 정 1품 '군'이 되어
함안군부인 함안 윤 씨와 8남 3녀를 낳았고
1490년(성종 21년) 7월에 사망했습니다
옥산군묘와
옥산군의 7남인 순안군 이희묘 사이 산길로
온녕군묘를 가려다 길을 잘못 들어 고골길까지 내려가
동헌로 235번 길로 돌아오며 30여분을 허비한 후
온녕군과 후손 8분의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사당인
혜덕사를 찾았습니다
사당 대문에는 부정을 막는 홍살과
숭모문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있고 대문을 지나면
혜덕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당 오른쪽에 있는 연못과의 사잇길로
소나무 숲을 지나면 언양 김 씨 묘소가 있고
묘소 오른쪽 오르막 산길과 나무계단을 200m쯤 올라가야
온녕군 묘소가 있습니다
온녕군(1407년~1454년)은
태종의 서자로 일곱 번째 아들이자 근령군 이농의 형으로
어머니는 신년궁주 신빈 신 씨이고 친형인 함녕군과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숙련옹주, 소신옹주, 소숙옹주,
숙경옹주 등 7명의 누이가 있습니다
무예가 뛰어나
19세에 날아가는 꿩을 맞춰 세종에게 안구마를 하사 받기도 했고
지혜와 총기를 겸비하여 영특하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익산군부인 순천 박 씨와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어
이복동생인 근녕군의 차남인 우산군 이종을 양자로 들였고
양자로 들어 온 우산군이 6남 2녀를 두어
이들의 후손이 번창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 씨 온녕군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1454년(단종 2년) 6월 16일 47세로 사망해
서울 성북구 미아동 삼거리 서쪽 언덕에 모셨었으나
도시 확장공사로 인해
고양시 대자동의 현재 묘역으로 1962년에 이장했습니다
온녕군 묘소를 내려와
사당 오른쪽 연못 오른쪽 계단 위로 보이는 묘가
근녕군의 차남으로 온녕군의 양자가 되어
온녕군파 자손을 번성시킨 우산군의 묘역이 있습니다
우산군은
근녕군 이농의 차남이지만
후사가 없는 온녕군의 양자로 들어와 6남 2녀를 낮아
전주 이씨 온녕군파를 번성시키던 중
연산군의 갑자사화 때
차남인 무풍군이 사사되는 것을 시작으로
형제들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면서 고초를 겪다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산군 묘역에서 내려와
동헌로 235번 길 좌측으로 100여 m 지점에 서있는
공덕비 우측 산기슭으로 들어가
온녕군의 손자로 우산군의 차남인 무풍군의 묘역이 있고
무풍군묘 뒤로 100여m 들어가
좌측에 우산군의 장남인 용성군 원의 묘가 있고
우측으로 우산군의 5남인 금천군 변의 묘도 있습니다
우산군의 세 아들 묘역까지 돌아보고
주차한 곳으로 가기 위해 산을 내려왔는데
무풍군 묘역이 있는 산 아래 동헌로 235번 길 바로 옆에서
연산군시대 금표비를 발견했습니다
경기 옛길인 의주길 제2길인
고양관청길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10-2번지에 있는
"연산군시대 금표비"
높이 138Cm, 가로 54Cm, 두께 22.5Cm의 비석으로
입각문에는
'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처참'이라 쓰여있는데
'이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왕명을 어긴 것으로 보아 처벌을 할 것'
이라는 내용이랍니다
고양군은 연산군 10년(1504년) 왕의 유흥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고양군으로 복귀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연산군시대 금표비까지 보고
근녕군묘 입구에 주차한 차로 돌아와 귀가하며
목표를 넘겨
15,000보 이상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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